뭉크의 흡혈귀는 섬뜩했다.
여인의 무시무시한 분위기 앞에서 목을 물린 남자는
뒷통수에서 어쩔 수 없다는 수긍의 분위기가 풍겨나왔다.
김영하의 흡혈귀는 무기력했다.
1850년대부터 살았다던 흡혈귀는 사는 것조차 귀찮아 보였다.
뭉크의 흡혈귀처럼 애인을 죽이지 않았는데도 호들갑 떠는건 오히려 남편을 흡혈귀로 의심하는 부인이다. 일거수일투족 남편의 흡혈귀적 정체성을 인정하라고 닥달을 한다. 물론 살아있는 사람에게 흡혈귀란 존재자체는 공포스럽다. 하지만 연극이 끝난 순간 내 안타까운 맘은 살아야'만'하는 흡혈귀에게 쏠려있었다.
모든 흡혈귀들은 거세당했다.
소수들이여,
삶에 대한 태도는
어떤 시선이든 간에 살아야'만'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다.
+ 역시나 흥미진진한 김영하씨의 공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