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어 올해도 2월 마지막 주에 청소년 한옥으로의 초대가 계획되었다. 같은 때에 같은 장소를 다시 가게 되는 것도 귀한 우연이라 생각하며 인솔자 모집에 선뜻 지원하였다. 다행히도 아이들과 개평마을에서 북적대며 지낼 기회가 또 주어짐에 '이번엔 어떤 아이들과 무슨 재미난 일이 벌어질까..'하는 설렘이 마음에 가득 찬다.
몇몇 인솔자 선생님들과 하루 전에 개평마을에 내려가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소풍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아이들이 개평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삼시세끼를 준비해 주실 부녀회 어르신들께서는 새로지어진 마을 회관 대청에 벌써 강정과 약과를 그득하게 쌓아두셨고, 식단표를 짜서 찬도 미리 마련해 두셨다. 마을회관에서는 부녀회 어르신들이 까르르 웃으시며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으시고, 밖에서는 이장님을 비롯한 어르신들께서 너른 벌판에 지으신 달집을 화장하느라 분주하셨다. 예쁘게 색끈으로 화장시키고 저 위 달집 꼭대기에 덕담이 담긴 천을 걸고 나니 오호라, 달집주제에 풍채가 당당하다. 별로 일을 돕지도 못했는데 시골의 겨울답게 해는 금방 넘어갔고, 날은 금세 쌀쌀해졌다. '아이들이 춥게 입고오지 말아야 할텐데..' 걱정이 앞선다.
첫째날.
아침부터 떠들석하다. 점심 때가 되자 아이들이 오는 날이라고 어르신들께서는 곱게 차려입으시고 신나게 장단을 맞춰가며 마을 어귀로 내려가셨다. 흥겨운 장단에 벌써부터 어깨가 들썩여진다.
아이들이 도착하자 "개~평 마을~ 환영합니다~" 란 장쇠어르신의 큰 외침에 흥겨운 장단이 덧붙여진다. 신영훈 선생님이 먼저 내리셔서 마을 어르신들과 정겹게 인사를 나누시는데 뒤따라 내린 아이들은 어리둥절 아직 잠에서 설 깬 모양이다. 아직은 어색하고 쑥쓰러워하는걸 보니.
앞으로 개평마을에서 지내는 동안 가장 많이 들락거릴 일두고택에서 서로 첫 인사를 나눈다. 마을 어르신들과 한 번 인사를 나누고, 2박 3일 함께 지낼 인솔자 선생님과 친구들도 인사를 나눴다. 얼핏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도 내가 눈에 익은지 '어? 선생님!' 하더니 쪼르르 달려오는 모양새가 반가운 눈치다. 기억해주는 게 기특하고 살짝, 보람마저 느낀다.
일두고택을 한바퀴 돌아보고 사랑채에서 신영훈 원장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집은 사람과 같아, 내 집은 어떻게 지어야 할까? 창, 문은 어떻게 사람이 편할 수 있을까에 관한 생각에서 나온 거란다, 교실 바닥이나 문 등 나무가 쓰인 곳에 못박혀있어서 위험하지만 우리 한옥에는 못을 쓰지 않는단다.." 아이들이 귀를 쫑긋하고 원장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머름에 대해서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떡하니 머름대에 팔을 기대고 얘기를 듣는 걸 보니 속으로 웃음이 나기도 하고, 짐짓 알려주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쓰임을 알다니! 자연스럽게 사람을 배려한 한옥에 다시한 번 경탄하게 되었다.
이어진 모둠활동시간. 마인드맵을 그려 서로를 소개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것, 커서 하고 싶은 것, 나를 나타내는 것들 등을 색연필로 그려 발표하였다. 린- 이라고 소개한 우리조 큰언니 다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수진이, 씩씩한 희주, 동물들을 좋아한다는 막내 지원. 아이들이 참 예쁘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모여앉아 작년에는 심청전으로 우릴 상상의 나라로 이끌어 주신 최래옥선생님께서 올해에는 춘향전으로 맛깔스런 이야기 한마당을 펼쳐주셨다. 어머니들은 아이들보다 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이야기 삼매경에 한창이셨다.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 장면에서 꼬마 성준이가 바닥에 찰싹 들러붙어 때리는 시늉을 할 때마다 "아이고~ 아야~"를 외치며 일품인 연기를 하는 동안 관중들은 깔깔대고 까르르 거리며 즐거워했다. 책속에 박제된 이야기가 아니라 눈 앞 바로 귓전에서 듣는 판소리 한 판과 이야기 한 보따리로 우리 아이들이 넉넉한 상상력과 일생을 사는동안 품어야 할 귀한 심성을 배우는 좋은 시간이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이들과 모여 앉아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원이는 공책에 적은 한 줄 글귀를 읽어주었다. "나무를 만지면 재미있는 느낌이 난대요." 낮에 들은 원장님 말씀이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캠프 기간동안 아이들이 우리 것에 담긴 심성을 마음에 담아간다면 그것이 제일 뿌듯한 일이야, 열심히 도와야겠구나 란 생각이 절로 든다.
둘째날.
'늦었다!'
낯선 곳에서의 첫 날이라 아이들이 잠을 뒤척이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코도 골고 360도 회전으로 발길질도 해가며 이불 뻥뻥 걷어차고 잘만 자는걸 나는 잠을 설쳐가며 지켜보느라 아침 일정부터 우리 조는 지각이었다.
종암을 시작으로 일두선생님 산책길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일정. 아이들은 눈을 다 못뜨고 졸려하더니 찬바람 쐬며 앞에 가시는 이장님의 빠른 걸음을 뒤쫓다 보니 자연스레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다. 투덜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앞사람 따라잡는게 조급해 진다. 어느정도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니 나무 때문에 한 눈에 다 들어오진 않는다. 더 높은 곳에 오르니 이제야 한 눈에 마을 모양새가 보인다.
'우와-'
아이들은 휙 둘러보더니 금세 여기저기 마을의 주요 집들을 찾아낸다.
'저기는 5조 집이구요~ 저쪽은 지곡초등학교구요~ 저기는...'
이른 아침 산책 덕에 밥이 꿀맛이라 큰언니부터 막내까지 밥을 싹싹 비우고 일찍 일두고택에 가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안채 대청에 햇볕이 적당하게 들어 마루가 따스하니 앉아있는 아이들 기분이 좋은가보다.
일두고택 사랑채에 모여 한옥의 구조에 대해 배우는 시간. 최종욱목수님께서 조그만 메를 하나 드시고 재미난 설명과 함께 기둥을 세우고, 창방을 끼우고, 주두를 얹고, 보를 얹고, 도리를 얹어 금세 뚝딱뚝딱 집을 지으셨다. 생소한 단어는 큰소리로 따라 외쳐도 보고 익숙한 단어에는 먼저 아는척도 하며 같이 합심하여 집을 지으니 상량식을 할 때에는 제 손으로 집을 지은양 뿌듯해하는 눈치다.
작년에 임기를 마치신 前 이장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마을을 한 바퀴 도시며 설명해 주셨다. 우리조에게 주어진 과제가 '마을지도 만들기'여서 우리조 아이들의 눈은 유난히 반짝인다.
"개평마을에 사당이 있는 집은 세 집 밖에 없어. 여기가 그 중에 하나야. 이 집에 왜 문지방이 없는 줄 아니? 주인 어르신께서 누구나 평등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문지방을 없애셨단다.."
前 이장님의 설명을 바탕으로 모둠활동 시간에 아이들과 마을지도를 그리기 위해 직접 둘러 볼 몇몇 집을 골라, 가서 스케치 하고 조사한 내용을 간단히 메모도 하였다. 아직 겨울이지만 낮에는 해가 제법 더워서 아이들은 해를 피한다고 담벼락에 쪼르르 붙어앉아 요모조모를 꼼꼼히 기록한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보는 집은 신기하기도 하다. 반짝반짝한 생각들에 나의 부족한 배움을 느낀다.
모둠활동을 마치고 우리 조상들께서 책을 만드신 방법대로 한지를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손 뿐 아니라 얼굴, 팔꿈치에도 먹물을 묻혀가며 탁본을 하고, 직접 끈으로 묶어 책을 만들어 보는 일이 서울아이들, 개평아이들 할 것 없이 처음이었기에 서투르고 우왕좌왕하였다. 그 와중에 완성된 첫번째 희주의 책! 그제서야 '아하, 저렇게 하는 거구나' 너도나도 끈을 들고 꿰기 시작한다. 우리 옛 책의 끈 매듭이 안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또 한 번 지혜로움에 감탄한다. 완성된 책을 한 권씩 꿰차고 마을로 돌아가는 길이 뿌듯해 보인다.
저녁먹고 둘러앉아, 얼씨구나! 오늘은 흥이 제대로 난다. 장구를 치며 소리를 하시는 선생님을 따라 한소절 한소절 따라부르다 보니 민요를 벌써 세 개나 외워버렸다. 시큰둥 하던 아이도 손으로 무릎 장단을 치며 신명나게 따라부르고 있다. 세대가 바뀌었어도 우리 민족의 흥과 춤사위는 여전한걸까. 이 때만큼은 세대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흥을 이어 소원을 담아 달집도 태우고 쥐불놀이도 했다. 잔뜩 오른 아이들의 흥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더니 달집태우며 구운 고구마와 강정을 잔뜩 먹고나서야 기분좋은 졸음으로 형체를 바꾸었다.
셋째날.
떠나야 하는 날인데, 우리를 보내기가 아쉬운지 비가 솔솔 오신다. 하지만 괜스레 마음이 짠해질 틈도 없이 아침밥을 먹고 모둠별 발표준비에 몸도 마음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만만하게 본 마을지도 만드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반짝반짝, 잘도 해낸다.
일두고택에 선생님과 어머니들, 아이들이 모두 모여 그동안 모둠별로 맡은 주제를 발표하였다. 짧은 시간에 해낸 발표물 치고는 굉장하다. 언제 다 그런걸 눈여겨 보고 다녔는지, 또 한 번 내 마음은 부족해진다. 같은 공간을 살펴보더라도 마음에 담아오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뻔한 진리를 느낀다. 다들 이쁘지만 제각각 다른 모양새에 다른 눈을 가진 아이들인데 이곳에서 무엇을 담아갈까. 신영훈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 해주신 말씀대로 눈에 담은 것을 바탕으로 '내 집을 이렇게 지어야겠다'는 마음다짐을 가져가겠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마을 어르신들이 손수 배웅을 해주신다. 아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시는 모습에 아침에 짠해지지 못했던 마음이 슬그머니 일어선다.
귀한 우연이라 생각하여 함께한 함양행사에 귀한 인연까지 얻어 나에겐 더없이 풍족한 경험이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던 개평 어르신들의 마음과 신영훈 선생님께서 해주신 좋은 말씀, 가장 수고하면서도 아이들을 위하는 문화원 식구들과 모둠 선생님들의 고운 마음 씀씀이, 그리고 아이들의 반짝반짝하는 마음까지.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고 배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표현하고 싶었는데 막상 헤어질 때엔 좋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남이 볼새라 부끄러워 마음만 가지고 있던걸 이제서야 풀어놓는다.
